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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환상으로부터 - 나의 사랑, 매기, 김금희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

 

 

  사랑에도 완결이 존재할까. 완벽한 사랑의 차단,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 일이라면 우리는 그 차단을 완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살면서 겪는 많은 경험들은 뜻하지 않게 시작되었다가 다시 뜻하지 않게 끝난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출생부터가 자신의 의지하고는 거리가 멀다. 지나가면 지나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 되는 것을 우리는 놓지 못해서 붙잡고 만다.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인생의 한 에피소드가 끝나버리면, 그 이야기는 에필로그 없는 결말처럼 단칼에 싹둑 잘려나간 것만 같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우리는 결말을 계속 살아간다. 결말에서 멈춘 에피소드를 마음 한편에 두고 달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멈춰서 다시 뒤를 돌아보면서 아름다웠더라고 얘기한다. 마음까지 완결 나지 않은 자신의 한 부분을 말이다. 그것은 추억이고, 아름다운 미련이다. <나의 사랑, 매기>는 '한때' 라고 얘기하던 액자 같은 추억과의 재회를 그려내고 있다.

 



어느 날은 현재의 사랑과 미래의 사랑이 동일하리라고 약속하는 것도 같았고, 또 어느 날은 이 기약 없는 연애는 초저녁에 정리하는 편이 낫다는 선언처럼도 느껴졌다. 아니면 그 둘 모두를 포괄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사랑의 형식인 연애는 끝이 나지만 사랑이라고 하는 상태는 끝이 나지 않아서 미래가 현재의 무제한 연장인 것처럼 어쨌든 유지되리라는 것, 가능한 죽을 때까지 사랑하리라는 것.

 

p.22

 



  연애라는 사건이 끝나도 사랑은 같이 꺼지지 못한다. 불을 껐다 켜는 것처럼 사랑도 감정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서 인간은 그리도 쉽게 사랑을 따라가버리는 걸지도 모른다. 재훈은 매기를 만나는 순간마다 수많은 갈등을 하지만 매기를 놓지는 못한다. 그것은 분명 매기를 사랑하기 때문이겠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대학 시절에 어설프게 꺼두었던 매기를 향한 마음 스위치를 다시 손에 쥐게 된 것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재훈은 다시 한 번 그 시절에 느꼈던 감정을 조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름이 아니라 별명을 지어 부르자는 규칙이 추가된 날, 우리는 호텔에서 자고 새벽에 종로로 나와 아침 식사 거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는데, 매기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그 분명한 선으로 그어진 보도블록의 촘촘한 간격만큼 모멸이 연속되는 듯했다.

 

p.34

 



  재훈은 군대에서 매기에게 "나는 인간이니까 당연히 섹스를 하며 살아야 해.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는 편지를 받고 나서도 사랑을 멈추지 못했다. 일방적으로 지어버린 결말이었다. 재회했을 때에도 재훈은 둘의 불륜 관계를 숨기기 위해 별명을 지어 부르자는 규칙을 들어야만 했다. 일방적인 설정, 그것은 환상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러나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목적을 인지하면 할수록 자신이 빠져있는 상황이 현실감각과 멀다는 것을 자각해야만 하는 고통이 따랐다. 재훈의 도덕적 잣대나 신앙심은 그 갈등을 더욱 심화했다. 매기의 모든 것이 재훈의 세계를 뒤집고 있었다.

 



출판사 동료들과 함께 야근이 끝나고 광화문으로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엉뚱하게도 이렇게 해서 세상이 바뀐다면 매기와 나의 관계에도 어떤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했던 오늘은 단지 긴 현재일 뿐인 미래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p.109

 



  매기는 재훈에게 작별을 고할 때 "잘 지내, 미래는 현재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단지 긴 현재일 뿐이야"라고 했다. 군대에 있던 재훈이 발버둥치지 못하고 있을 때 말이다. 재훈은 불륜이라는 사실에 절망하기도 했지만 매기와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세상이 바뀌면 우리의 미래도 행복했던 현재의 연장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재훈의 생각은, 사정은 달라도 어쩐지 공감이 가는 말이다. 하지만 바람이 흘러가는 것처럼 생각났다가도 금방 지나가버린다. 세상이 바뀌거나 과거의 일이 바뀐다고 해도 현재는 이상향과 동일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담아드릴까요? 나는 배낭을 메고 있었지만 넣어달라고 했고 그가 비닐봉지를 뜯어 그것을 넣고 내가 건넬 때 어쩔 수 없이 손가락들이 스쳤다. 나는 그것을 주고받았을 때의 느낌을 아마 긴 시간이 흘러도, 어쩌면 매기와 관련한 기억들 중에서 가장 무거운 무게로 가져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어디에도 미뤄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매기에게도 정권에게도 이 세상이나 어느 사랑에게도. 아무리 동산 수풀은 사라지고 장미꽃은 피어 만발하더라도, 모두 옛날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시간이 지나 나의 사랑, 매기가 백발이 다 된 이후라도.

 

p.124



  재훈이 얻은 무게는 매기와 함께 보낸 시간들의 대가였을까. 아니면 그 무게까지도 매기에 대한 사랑의 한 부분이었을까. 아마도 그 무게로 하여금 사랑에 지퍼를 채우고 닫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을 잠그는 것, 그것은 보관에 가까운 결말이다. 완결이나 완벽한 끝이라고 말하기는 모호하고 그저 보관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보관 후에 상태가 변화할지 아니면 같은 상태로 남아 있을지 그것도 아니면 소멸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의 과정이라고 할 수는 없을까. 환상이 사라지고 더 이상 사랑을 영위할 수 없게 되어도 어딘가 한 자락 남아있게 되는 것, 이름을 붙이지는 못해도 그것이 어느 쯤의 과정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무게를 지고 살면서 흉터를 훑어보듯 추억을 가늠하는 것이다.

 



  김금희 작가는 특별한 사건 없이 인물의 특색 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깊은 이야기를 만든다. 개성있는 인물이 행하는 모든 것이 특별한 사건이 되는 느낌이다. <나의 사랑, 매기>는 이 세상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할 것 같은 사람들의 얘기처럼 느껴진다. 재훈과 매기가 재회를 했을 때 서로를 놓지 못했던 감각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을까. 그런 물음을 지닌 채로 소설의 끝을 달리게 된다. 결론이 무엇이라고는 단정 짓지 못하겠다. 그러나 소설은 완결이 났어도 재훈의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자유로이 남아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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