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노트 썸네일형 리스트형 [시 필사]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선잠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그해 봄에 얼마 전 손목을 깊게 그은 당신과 마주 앉아 통닭을 먹는다 당신이 입가를 닦을 때마다 소매 사이로 검고 붉은 테가 내비친다 당신 집에는 물 대신 술이 있고 봄 대신 밤이 있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 대신 내가 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왜 봄에 죽으려 했느냐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신이 내게 고개를 돌려 그럼 겨울에 죽을 것이냐며 웃었다 마음만으로는 .. 더보기 [시 필사] 구관조 씻기기,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이 책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새를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비현실적으로 쾌청한 창밖의 풍경에서 뻗어 나온 빛이 삽화로 들어간 문조 한 쌍을 비춘다 도서관은 너무 조용해서 책장을 넘기는 것마저 실례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어린 새처럼 책을 다룬다 "새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습니다. 새는 스스로 목욕하므로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 새를 키우지도 않는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어째서였을까 "그러나 물이 사방으로 튄다면, 랩이나 비닐 같은 것으로 새장을 감싸 주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긴 복도를 벗어나 거리가 젖은 것을 보았다 여름 이후 어젯밤 경미가 죽었다 수영이는 아빠랑 싸웠고 재희는 자동차에 치였다 예나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미연이는.. 더보기 [시 필사] 사랑을 위한 되풀이, 황인찬 you are (not) alone (모난 괄호를 보면 갇히는 기분이다 그렇게 말한 것이 김춘수였을 것이다 휘어진 괄호를 보면 사라지는 기분이 들까 공이나 새 따위의 궤적이 지금도 사라지고 있겠지 자꾸 생각해본다 둥근 공이나 둥근 새 같은 것들이 기호로 보인다) 나는 사랑을 느끼는 중이다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너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그것을 증명하는 중이다 () 때로 좋은 일이 일어난다 어제는 무릎으로 기어가 제발 사랑해달라고 빌었다 부곡 폐업한 온천에 몰래 들어간 적이 있어 물은 끊기고 불은 꺼지고 요괴들이 살 것 같은 곳이었어 센과 치히로에서 본 것처럼 너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다들 어디론가 멀리 가버렸어 풀이 허리까지 올라온 공원 아이들이 있었던 세상 세상은.. 더보기 [소설 필사] 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P.36 "왜 그러고 사니?" 주영이 아폴로를 발견하고 나서 가장 자주 들은 말이었다. 그 말을 정말이지 다채로운 톤으로 들어왔다. 영하 40도의 무시, 영상 23도의 염려, 70도의 흐느낌, 112도의 분노로. P.37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거인이 휘저어 만든 큰 흐름에 멍한 얼굴로 휩쓸리다가 길지 않은 수명을 다 보내는 게 대개의 인생이란 걸 주영은 어째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P.84 경민이 입은 흰 티는 어쩐지 달빛에 발광하는 듯했는데 한아는 오랫동안 봐온 그 등에서 익숙함을 찾으려 노력했다. 저 등은 언제나 가슴을 아프게 했었다. 한아를 .. 더보기 [시 필사]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임솔아 석류 창문은 창밖에 서 있는 나를 보게 한다. 내 허벅지 위로 도로가 나 있고 내 허리 속으로 막차가 도착한다. 사람들이 쏟아져 내리고 내 가슴 속 빌딩으로 걸어 들어간다. 가슴에 손을 넣어 창문을 연다. 한 여자가 화분을 분갈이하고 있다. 그 아래 창문을 열면 하얗다. 갓난아이가 눈을 움켜쥔 채 설원 위를 기어 간다. 그 아래 창문을 열면 내 눈썹에서 가로등이 켜진다. 내 이마에서 비행기가 지나간다. 몸속에 있던 도시가 몸 밖으로 배어 나온다. 마지막 창문을 열면 창 안에 서서 창문을 세어보는 나를 볼 수 있다. 알알이 유리가 빛나고 있다. 불을 끄면 창밖에 서 있는 나와 창 안에 서 있는 내가 함께 사라질 수 있다. 모래 오늘은 내가 수두룩했다. 스팸 메일을 끝까지 읽었다. 난간 아래 악착같이 매달려.. 더보기 [소설 필사] 나의 사랑, 매기, 김금희 P.21 "잘 지내, 미래는 현재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단지 긴 현재일 뿐이야" P.22 어느 날은 현재의 사랑과 미래의 사랑이 동일하리라고 약속하는 것도 같았고, 또 어느 날은 이 기약 없는 연애는 초저녁에 정리하는 편이 낫다는 선언처럼도 느껴졌다. 아니면 그 둘 모두를 포괄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사랑의 형식인 연애는 끝이 나지만 사랑이라고 하는 상태는 끝이 나지 않아서 미래가 현재의 무제한 연장인 것처럼 어쨌든 유지되리라는 것, 가능한 죽을 때까지 사랑하리라는 것. P.26 나는 그렇게 내 인생 전부가 시험에 든 것처럼, 트라우마와 유년의 슬픔, 핸디캡, 콤플렉스, 꼬인 마음 전부를 그 문장에 담갔다 뺐다 하면서 시들시들 곯아갔다. P29 나는 그것을 열어보는 일을 최대로 미루고 있다가 .. 더보기 [시 필사]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류인서 교행 조치원이나 대전역사 지나친 어디쯤 상하행 밤열차가 교행하는 순간 네 눈동자에 침전돼 있던 고요의 밑면을 훑고 가는 서느런 날개바람 같은 것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느 세계의 새벽과 네가 놓쳐버린 풍경들이 마른 그림자로 찍혀 있는 두 줄의 필름 흐린 잔상들을 재빨리 빛의 얼굴로 바꿔 읽는 네 눈 속 깊은 어둠 실선의 선로 사이를 높이 흐르는 가상의 선로가 따로 있어 보이지 않는 무한의 표면을 끝내 인화되지 못한 빛이 젖은 날개로 스쳐가고 있다 톡 톡 그 여자는 매니큐어 바르기를 좋아한다 올 터진 스타킹 갈라진 손톱 찢어진 나비날개 분홍빛 벌레구멍 솔기 끝 어디에든, 손가락만한 매니큐어를 만지작거리며 그 여자는 금간 애인과의 사이를 어떻게 메울까 한동안 훌쩍거리다 고양이처럼 달랑 의자에 올라앉아 엄지발톱.. 더보기 [시 필사] Lo-fi, 강성은 섣달그믐 고양이가 책상 위에 잠들어 있다 고양이를 깨우고 싶지 않아 나는 따뜻한 음식을 만들기로 한다 손에 든 감자 자루를 놓치자 작은 감자알이 끝도 없이 굴러 나온다 쏟아지는 감자를 어찌할 수 없어 멍하니 바라보는데 갑자기 라디오가 저절로 켜지고 어제 들었던 노래가 흘러나와 밖에선 종말처럼 어두운 눈이 내리고 있고 나는 이제 잠에서 깨버릴 것 같은데 집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고양이가 너무 오래 잔다 밝은 미래 자정 너머 눈 쌓인 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 남자 인적 없는 밤길 둘에 하나는 고장 난 가로등 갸우뚱했지만 남자는 발이 푹푹 빠져 들어가는 눈길을 겨우 헤치고 나아간다 어디선가 살아 있는 것이 낑낑거리는 소릴 들었지 눈 속에 파묻힌 개를 끌어 올려 품에 안고 작은 개야, 오늘 밤은 나와 함께 가.. 더보기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