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not) alone
(모난 괄호를 보면 갇히는 기분이다 그렇게 말한 것이 김춘수였을 것이다 휘어진 괄호를 보면 사라지는 기분이 들까 공이나 새 따위의 궤적이 지금도 사라지고 있겠지 자꾸 생각해본다 둥근 공이나 둥근 새 같은 것들이 기호로 보인다)
나는 사랑을 느끼는 중이다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너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그것을 증명하는 중이다
()
때로 좋은 일이 일어난다
어제는 무릎으로 기어가 제발 사랑해달라고 빌었다
부곡
폐업한 온천에
몰래 들어간 적이 있어
물은 끊기고
불은 꺼지고
요괴들이 살 것 같은 곳이었어
센과 치히로에서 본 것처럼
너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다들 어디론가 멀리 가버렸어
풀이 허리까지 올라온 공원
아이들이 있었던 세상
세상은 이제 영원히 조용하고 텅 빈 것이다
앞으로는 이 고독을 견뎌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긴 터널을 지나 낡은 유원지를 빠져나오면
사람들이 많았다
너무 많았다
이것은 나의 최선 그것이 나의 최악
어두운 밤입니다
형광등은 저녁 동안의 빛을 아직 다 소진하지 못하고 희미한 빛을 뿜습니다 하지만 금세 꺼져버리는군요
밖에서는 청년들이 떠드는 소리, 지금이 몇시냐고 외치는 소리, 이윽고 모든 것이 조용해집니다
직전에 멈춰야 해요
요새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날이 추워져서 얇은 이불로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시린 발을 비비다 옆 사람의 따뜻한 발과 닿으면 "자?" 저도 모르게 묻게 되고, 그러면 "응" 대답이 돌아오는 군요
그러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무슨 할 말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아직 어두운 밤입니다
야광별이 박혀 있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언제쯤 멈출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끝이 어딘지 알아야 할 텐데
알 도리는 없습니다
그래도 직전에
직전에 멈추지 않으면 안 돼요
멈추지 않으면
다 끝나버리니까
지난여름에는 해변에 흩어져 있는 발자국들을 보며 지난 밤의 즐거웠던 춤과 사랑의 기억 따위를 떠올렸습니다만 지금은 좁은 침대에 누워 어깨를 움츠린 채
잠들어 있는 옆 사람을 살짝 밀어볼 뿐입니다
밀리지는 않는군요 이대로 잠들 수는 없겠군요
그러거나
말거나
새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이군요
창밖에서는 또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레몬그라스 똠양꿍의 재료
똠은 끓인다는 뜻, 얌은 새콤하다는 뜻
꿍은 새우
레몬그라스는 똠양꿍의 재료
혼자서 먹었어요,
망원동의 골목에서요
여름이었고, 밤이었고, 너였고, 무한하게 펼쳐진, 나랑은 무관한 별들이었고, 새콤한 게 더운 날에는 딱이니까
향긋한 파 같은 레몬그라스
쑥갓을 닮은 고수
이 시는 겨울에 생각하는 여름밤에 대한 시,
출출한 밤이 오면 생각나는 시
똠은 끓이고, 얌은 새콤하고, 입맛 없을 때 아주 좋은 시,
놀 거 다 놀고, 먹을 거 다 먹고,
그다음에 사랑하는 시
상상만 해봤어요
밖에 눈이 와서요
따뜻한 우동 국물이 생각나는 밤이라서요
똠은 끓인다는 뜻, 얌은 새콤하다는 뜻
꿍은 새우
레몬그라스는 똠양꿍의 재료
뜻이 있다고, 없다고, 누가 자꾸 말하고
식탁 위의 연설
왕십리는 미아리가 되고 차창에 들어오는 빛이 옥스퍼드 셔츠가 되고 유모차는 다리 저는 개가 되고
잠들어 기댄 어깨가 어두운 종점이 되고
늙은 나무는 고향집의 은유가 되는
그것이 삶이라니
돌아오는 길은 모르는 동네다 공원을 걷는 사람은 호수의 조명이고
매일 밤 거실 바닥에 누워 생각한 것은
잠들면 모두 까먹게 된다
너무 이상해
문을 열고 나가면 아는 것들만이 펼쳐져 있는데, 문을 열고 나가면 모르는 일들뿐이라니
그것은 네가 어느 저녁 의자 위에 올라서서 외친 말이다
나는 네가 의자에서 떨어지면 어쩌나
그것만 걱정했고
그런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고,
이제는 일상 말고는 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불가능한 경이
어떻게 말을 꺼내지, 어떻게 말하면 부끄럽지
않을 수 있지
너는 책상에 앉아 있고
나는 창 너머에 서 있고
백년째 복도를 헤매던 사람도 이제는 지쳤다고 한다
수업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들어오시면 아이들은 일동 차렷하고 인사를 하네
문을 열고 내가 들어가면 모두 놀라버릴 텐데
이상한 것도 놀라운 것도 이제는 버거운데
어떻게 말해야 하지, 어떻게 말하면
경이롭지 않을 수 있지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하시면 수업이 시작되시고
나는 창 너머에서 수업을 지켜봅니다
수업은 좋습니다 한국의 교육은 백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선량하고 아이들은 무구합니다
너는 판서된 것을 따라 적고
나는 창 너머에서 그것을 따라 읽고
어떻게 말을 건넬까 어떻게 해야 모든 것을 망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말을 하지 않고
어떻게 그 말을 할 수 있지
자꾸 고민하면서
백년째 말을 걸지 못하는 내가 있고
시간이 지나면 수업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나가시면 아이들이 복도로 밀려나오고
복도에 서 있는 내 앞에 네가 서 있다
손을 내밀고 있었다
무얼 하느냐고, 빨리 들어오라고
사랑과 자비
맞아, 그 여름의 바닷가에선 물새들이 끊임없이 울고 있었어 젊은 사람들이 해변을 뛰어다녔고 맞아, 우리는 개를 끌고 나왔어 그런데 그 개는 어디로 갔지?
쌓인 눈을 밟으면 소리가 난다
작은 것들이 무너지고 깨지는 소리다
우리는 그때 맨발로 뜨거운 아스팔트를 걷고 있었어 물놀이에 정신이 팔려 신발을 잃어버리고도 서로를 보며 그저 웃었고 그때 우리는 두 사람이었지
한 사람의 발자국이 흰 눈 위로 길게 이어져 있다
아주 옛날부터 그랬다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웃고 있는 서로를 보며 우리가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무엇을 보고 또 알았는지 끝없이 이어진 수평선을 보며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마음을 주고받았는지
"이런 삶은 나도 처음이야"
그렇게 말하니 새하얀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고
그때 우리는 사람으로 가득한 여름의 도시를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젖은 발이 뜨거운 지면에 남긴 발자국이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도 모르는 채로
겨울 호수를 따라 맨발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조건과 반응
"개는 너무 슬픈 동물이야"
옆 테이블의 남자가 말했어
너는 그냥 창밖을 보고 있었고
"자꾸 뭘 바라잖아, 사람 얼굴을 보면서......"
그때 우리는 호수공원 옆의 카페에 있었어 커다란 고무 오리를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지
"자기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게 너무 슬프다고......"
남자는 혼자 앉아 있고
너는 그냥 창밖의 오리를 보고 있어
아니면 오리를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개는 너무 슬픈 동물이야......"
남자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고,
나는 애써 그를 보지 않았지
울고 있는 어른을 보면
죄짓는 기분이 드니까
사람들은 그냥 오리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어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며, 손을 마주 잡고
"자꾸 뭘 바라게 된다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사라졌어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개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으니까
개가 바라는 것이란
맛있는 음식, 따뜻하고 안전한 집, 마음껏 뛰기와 힘껏 물어뜯기,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건네는 칭찬......
그런데 너는 지금 왜 울고 있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불안 속에서 너를 불렀어
그러자 너는 슬픔과 다정함이 구분되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쓰다듬어주었고
만약 내가 사람이었다면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십육 미터의 거대한 오리를 보며
자꾸 귀엽다고 말하고 있어
이것이 나의 최악 그것이 나의 최선
이 시에는 바다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 시는 우리가 그 여름의 바다에서 돌아온 뒤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과 그것이 우리의 삶에 불러일으킨 작은 변화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어느 토요일 오후 책장에 올려둔 소라 껍데기에 귀를 대며 거기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부러 확인한다거나, 한 손에 국자와 젓가락을 쥔 채 개수대로 흐르는 물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며, 갑자기 떠오른 지난 여름의 대화들에 혼잣말로 답해본다거나,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깜짝 놀라게 된다거나
뭐 그런 일들
어느 주말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까맣게 탄 그와 함께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 아름다운 것이 매달려 있었다
"이게 뭐지?"
그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을 때는 어째서인지 그것을 설명하면 큰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대답하는 대신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었던
돌이켜보면 아마 그는 우리가 결국 이 시의 마지막에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날 밤에는 늦도록 잠들지 않았다
즐거웠던 지난 일들에 대해 한참 이야기했다
폭죽 불꽃이 터져오르는 해변에서 불을 피우며 여럿이 어울려 춤을 추었던 그 밤과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태풍이 찾아와 살풍경한 해변을 웃으며 걸었던 일 따위에 대해 아주 짧았고 그래서 충실했던 날들에 대해
손을 잡은 채로,
손에 매달린 아름다운 것을 서로 모르는 척하며
그렇게 그 장면은 끝난다
이제 이 시에는 바다를 떠올린다거나, 바다에서 있었던 일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과 그 생활 따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이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여름과 그 바다가 완전히 끝나버렸는데도 아무것도 끝난 것이 없었다는 것에 대한 것이고
영원히 반복되는 비슷한 주말의 이미지들에 대한 것이고
내 옆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느끼는 소박한 기쁨과 부끄러움에 대한 것뿐
그렇게 삶이 계속되었다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말차
하얗고 작은 잔에서
김이 피어오릅니다
기억나는 것은
인간을 그만두기로 마음먹던 때의
서늘한 공기와 말차의 씁쓸함
눈떴을 때 여에 누운 것은
죽은 사랑의 얼굴
그런데도 그와 입을 맞추고 아침을 먹고
그를 보내는군요
시간이 없다며 그가 떠난 이곳에는 시간만 남아 있고
하얗고 작은 물 위에는 찻잎이 서 있습니다
찻잎이 서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누가 말했지만......
부서집니다
산산이
깨져나갑니다
그것은 발등이 뜨거워도
움직이지 않던 사람의 기억
사람의 목에 매달리던 사람의
목이 매달리던 날의 마음
전력을 다해
그만두고 싶습니다
화단의 철쭉에는
꽃망울이 매달려 있습니다
너무 많군요
마음은 너무나 작고
기억은 거의 부서져 있어서
이 시는 도약을 모릅니다
부엌 바닥에서
김이 피어오릅니다
발등은 너무 분홍빛이라
사진을 찍을 수도 있겠군요
이 시는 바닥에 흩어진 것이 모두 식고
다 말라 증발할 때까지 여기 한동안 머무르겠습니다
아프거나 슬픈 사람이 없어 다행이군요
그것은 가벼운 절망이다 지루함의 하느님이다
이 시에는 이미지가 없고
관념이 없고
기쁨이 없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떠올리는 온갖 좋은 것들이 이 시에서는 모두 지워지면 좋겠다 그렇게 지워지는 시
바람이 소리 없이 소리 없이 흐르는데
눈물의 그날 밤에 상아 혼자 울고 있나
송창식은 노래하고 송창식은 방이 넓어서 갈 곳이 없다면 좋겠다 우연히 얻은 것을 우연히 얻었다는 이유로 부끄럽게 여기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았다면
그 생각을 여기 적지 않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느끼는 참을 수 없는 기쁨과 배를 앓는 듯한 불안을 그리는 순간이 없으면 좋겠다
영원히 계속되는 미래가 오지 않는다면 좋겠다
아침도 오지 않는다면 더 좋겠다
무익한 건 좋다고 해놓고, 무해한 건 악한 일이라 말하는 일도 이젠 아무래도 좋겠다
이 시에는 기쁨이 솟아올라 남은 것이 없다면 좋겠다
기쁨은 놀라움과 안심이 겹쳐질 때 만들어지고
그것이 손쉽게 사랑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어렵게도 이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바람이지만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이 방에는 사랑이 흘러가고 관념만 남아서
그저 기뻐하기만 있으면 좋겠다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이 이 시에 담겨 영영 이 시로부터 탈출하지 못한다면 좋겠다
그것을 미래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이 손에 만져지는 돌이라면 좋겠다
그 돌을 먼 바다에 던질 수 있으면 좋겠다
바닷속 깊은 곳을 향해 느리게 침잠하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면
이 시에는 사랑이 없다면 좋겠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래 같은 것이 어디에도 없다면 좋겠다
그저 늘어지기만 하는 이 글이 시라면 좋겠다
시가 아니라면 정말 좋겠다
이 시에는 이미지가 없고 관념이 없고 사랑만 남는다면 좋겠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좋겠다
정말 좋겠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 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부서져버린
어떻게 끝내야 할까,
그런 고민 속에서 이 시는 시작된다
문이 열리는 것이 좋을까, 영영 닫혀 있는 편이 좋을까, 아니면 문이 열렸지만 아무도 없었다는 결말은 어떨까
......그런 생각 속에 있을 때,
"우리 이야기 좀 하자"
맞은편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어떨까 목소리가 들려오면 이야기라는 것이 시작되겠지
어떤 목소리는 이야기와 무관하게 아름답고, 어떤 현실은 이야기와 무관하게 참혹하고, 그런데도 이야기를 하자는 사람이 있구나
이야기라는 것은 또 대체 무엇일까
창밖은 어둡고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다
창에는 창밖을 내려다보는 내가 반사되고, 여길 좀 보라는 목소리가 있고, 또 이제 그만 끝내자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런 일이 이어진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어떻게 끝내야 할까,
영원한 폭우 속에 갇혀버린 채로 끝난다면 어떨까, 문을 열고 나가니 전혀 다른 골목에 도착한다면, 어쩌면 영원히 계속되는 이야기로 이야기를 끝낼 수도 있겠지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다
그렇게 끝내면 정말 끝나버릴 것만 같다
"우리 이야기 좀 하자"
이렇게 이 시를 끝내기로 했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네게 말을 건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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