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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노트

[시 필사] 구관조 씻기기, 황인찬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구관조 씻기기


  이 책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새를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비현실적으로 쾌청한 창밖의 풍경에서 뻗어
  나온 빛이 삽화로 들어간 문조 한 쌍을 비춘다

  도서관은 너무 조용해서 책장을 넘기는 것마저
  실례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어린 새처럼 책을 다룬다

  "새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습니다. 새는 스스로 목욕하므로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 새를
  키우지도 않는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어째서였을까

  "그러나 물이 사방으로 튄다면, 랩이나 비닐 같은 것으로 새장을 감싸 주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긴 복도를 벗어나 거리가 젖은 것을 보았다

 

 





  여름 이후


  어젯밤 경미가 죽었다

  수영이는 아빠랑 싸웠고 재희는 자동차에 치였다 예나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미연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책상 위에 흰 국화가 놓여 있다
  애들은 교복을 입고 있다

  수업 시간에 마음이란 걸 배웠다 죽어 버린 경미도 마음을 아느냐고 연아가 물었다

  은혜가 둘 중 누구랑 사귈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다음 주에 정화는 먼 곳으로 떠난다 선주는 꿈에서 연예인을 봤다

  경미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경미는 애들 마음속에 살아 있고,
  애들은 아직 살아 있다

  승희는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미라는 며칠째 학교에서 보이지 않는다 애들은 미라가 가출했다고 믿는다

  책상 위의 흰 국화는 노란 국화였다
  애들은 체육복을 입고 있다

 

 





  X


  체리를 씹자 과육이 쏟아져 나온다 먹어 본 적 있는 맛이다 이걸 빛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그건 먹어 본 적 없는 맛이다

  나는 벚나무 아래에서 체리 씨를 뱉는다 죽은 애들을 생각하며 뱉는다

  동양의 벚나무 서양의 벚나무는 종이 다르다 벚나무에서 열리는 것은 체리라고 부른다 벚나무는 다 붉다 벚나무는 다 죽은 애들이다

  나는 벚나무 아래에서 체리 씨를 뱉는다 벚나무 밑에는 시체가 묻혀 있고 그래서 더욱 붉고 그것은 전해지는 이야기로

  체리를 씹자 흰 빛이 들썩거린다 체리 씨를 뱉으면 죽은 애들이 거기 있다

  벚나무가 솟아오른다 체리 씨가 자라면 벚나무가 된다

  나는 거기서 체리 한 알 집어삼킨다 체리를 씹으면 체리 맛이 난다

 

 




  면역


  냉장고에 붙여 놓은 자석이 힘없이 떨어졌다 눈을 껌뻑이는 거북이가 수조 밖에 나와 있었다 그것을 보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 버렸어
  그렇게 생각했다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베란다의 바닥이 젖어 있었다 상관하지 않고 옷도 벗지 않고 소파에 누웠다 누가 앉았다 간 것처럼 따뜻했는데

  구독하지 않는 석간신문이 테이블 위에 있었고
  이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야 돌이킬 수 없다는 건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야

  집에 돌아왔는데, 여기서는 아무도 비참하지 않았다
  침실에 들어서자 잎이 무성한 선인장이 있었다

 

 





  발화


  중간이 끊긴 대파가 자라고 있다 멎었던 음악이 다시 들릴 때는 안도하게 된다

  이런 오전의 익숙함이 어색하다

  너는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지?
  왜 나를 떠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거지?

  통통거리는 소리는 도마가 내는 소리다 여기로 보내라는 소리는 영화 속 남자들이 내는 소리고

  어떤 파에는 어떤 파꽃이 매달리게 되어 있다
  어떤 순간에나 시각이 변경되고 있다

  저 영화는 절정이 언제였는지 알 수 없이 끝나 버린다
  그런 익숙함과 무관하게

  찌개가 혼자서 넘쳐흐르고 있다

  불이 혼자서 꺼지고 있다

  나는 너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지나친다

 

 





  소용돌이치는 부분


  봄은 오고
  사방으로 피어오르는 것들 꺼지는 것들

  실내의 가짜 꽃나무 아래 내가 앉아서
  거리를 헤매는 나를 불렀다

  이리 와 여기로 와
  어서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채 떠났다
  실망한 나머지
  진짜 꽃나무에 목매달았다

  굽어 가는 마음과 굽이치는 마음이 서로 부딪치고
  소용돌이가 소용돌이치는 봄날이 조용히 계속되었다

  이후로도 나는 드문드문 나에게 나타났다
  여기로 오라고 나를 부르며

  꽃나무에 매달린 채로 나에게 손짓했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목소리만은 어쩐지 선명하였다

  간혹 죽은 내가 잠든 나를 깨우기도 했다
  소용돌이가 소용돌이치는
  그 애매하고도 분명한 곳에서

 

 





  번식


  누군가의 병문안을 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차가운 과일 통조림을 들고 병실에 들어섰다 공기청정기가 끝없이 정화시키는 것들로 좁은 실내가 꽉 찼다

  "당신 생각을 오래 했어요 오래전에 나는 아팠어요"
  나는 웃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큰 웃음이, 갑작스러운 웃음이 끝없이 정화되면서 좁은 실내가 서서히 침묵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는데,

  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웃지 않았다 이걸 먹으라고,
  죽지 않는 과일을 내미는 손이 있었다

  백의의 남자 간호사가 문밖에서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것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고 그가 물었는데,
  죽은 것이 입에 가득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념사진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 어둠이 들어차 있다"

  어느 일본 시인의 시에서 읽은 말을, 너는 들려주었다 해안선을 따라서 해변이 타오르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걸 보며 걸었고 두 손을 잡은 채로 그랬다

  멋진 말이지? 너는 물었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대답을 하게 되고

  해안선에서 끝이 없어서 해변은 끝이 없게 타올랐다 우리는 얼마나 걸었는지 이미 잊은 채였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 슬픈 것이 생각나는 날이 계속되었다

  타오르는 해변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타오르는 해변이 슬프다는 생각으로 변해 가는 풍경,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는 어둠이 들어차 있었는데, 여전히 우리는 걷고 있었다

 


 


  의자


  여섯 살 난 하은이의 인형을 빼앗아 놀았다
  병원 놀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인형은 나의
  의사 선생님이었다
  나는 선생님께 아프다고 말했다
  어디가 아프냐 물어도
  아프다고만
  선생님은 내게 의자에 앉으라 하셨다
  의자는 생각하는
  의자였다
  앉아서 생각해 보라고, 잘 생각해 보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
  나는 울어 버렸다 무서워서
  너무 무서워져서

 

 





  속도전


  커튼을 열어젖힌 방에서 숨이 잠깐 멎었다
  생각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어서

  괜찮아?
  묻는 너에게 괜찮다고 답했다

  이미 누가 살다 간 것 같은 방, 다음 날 정오까지는 나가야 한다
  어지러운 화장대 위에는 작은 식물이 기울어져 있고,
  빛을 햐애 서서히 기울고 있다

  저녁인데 아직도 밝아
  놀란 척하는 너의 마음을 이해하는 척했다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낮 동안 있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조금은 슬프면서 조금은 웃기는, 아름답지 않은 모든 일들을
  평행 상태에 도달하는 두 속도의 가운데에서

  창 아래로 지나가는 오토바이의 뒷모습이 하나의 점에 수렵되어 가는 것에 잠깐 정신이 팔릴 동안
  식물은 어느새 더 기울어져 있었다

  식물이 식물의 속도로 나아가고 있을 때
  내일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직감했다

  창밖은 붉은빛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서서히 이동해 나갔다
  왜 자꾸 커지지? 나도 모르게 말이야 이 어두운 것이......
  혼잣말하는 너를 끌어안자 너의 젖은 몸이 느껴졌고

  나는 커튼을 닫았다
  아니지?
  묻는 너에게 아니라고 답하며

 

 





  혼자서 본 영화


  오랜만에 그를 만났다 그와 영화를 봤다

  그건 일상의 슬픔과 고독에 대한 영화였고,
  가는 비가 내리는 장면이 너무 많았다

  지나치게 절제된 배우의 연기가 계속되었다 그건
  내 인생을 베낀 각본에 의한 것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배우의 눈썹이 화면을 가득 채웠고

  영화가 끝나자 스탭롤이 올라갔다 그는 죽어 가는
  군인이 휘파람을 불 때 조금 울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영화에는 그런 장면이 없었고,
  내가 말해도 그는 믿지 않았다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저 멀리서
  비옷을 입은 아이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히스테리아


  눈을 떴을 때 지난밤의 꿈을 기억하고 있다

  꿈에서 본 것이 깨어나서 본 것과 거의 일치해서
  어리둥절해한다

  숨죽여야 해,
  그 사람이 문밖에 서 있으니까

  바닥에 뭉친 먼지들, 오래 살았던 흔적,
  그건 꿈속에서의 일이지 지난밤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무슨 일이 있었다니,

  이상한 소리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은 것

  나는 문을 열지 않았다
  열어 봤자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나는 문을 두드렸다

 

 





  무화과 숲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