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그믐
고양이가 책상 위에 잠들어 있다
고양이를 깨우고 싶지 않아
나는 따뜻한 음식을 만들기로 한다
손에 든 감자 자루를 놓치자
작은 감자알이 끝도 없이 굴러 나온다
쏟아지는 감자를
어찌할 수 없어 멍하니 바라보는데
갑자기 라디오가 저절로 켜지고
어제 들었던 노래가 흘러나와
밖에선 종말처럼 어두운 눈이 내리고 있고
나는 이제 잠에서 깨버릴 것 같은데
집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고양이가 너무 오래 잔다
밝은 미래
자정 너머 눈 쌓인 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 남자
인적 없는 밤길
둘에 하나는 고장 난 가로등
갸우뚱했지만 남자는
발이 푹푹 빠져 들어가는 눈길을 겨우 헤치고 나아간다
어디선가 살아 있는 것이 낑낑거리는 소릴 들었지
눈 속에 파묻힌 개를 끌어 올려 품에 안고
작은 개야, 오늘 밤은 나와 함께 가자
다시 컴컴한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장면을 보던 나는 알아버렸지
아,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구나
저들은 아주 행복해 보였고
그것은 오래전의 먼 일이었으나
가능하다면 미래이길
나는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카프카의 잠
그는 야근을 하고 있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라고 쓰자 그는 잠이 쏟아졌다
그가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를 뒤적이고 있을 때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이 야심한 시각에 사무실을 방문한 사람이 누굴까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걸어가 문을 열어주려 했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굳게 잠긴 문을 열어보려 애쓰다 이 문은 밖에서 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유심히 문을 바라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두드려보았다 똑똑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똑똑
그는 갇힌 것이다
아무도 없는 밤에
눈 내리는 사무실에
어마어마한 눈이 쏟아지고 쌓이고 있는데
건물이 눈 속에 파묻힐 것 같은데
그는 나가지도 못하고
그를 도와주러 올 이 하나 없는 것이다
저 눈을 멈추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흰 눈은 펑펑 쏟아지고
누구도 저 희고 무서운 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어
그가 잠에서 깨어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가 삶을 포기하고 나면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면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사랑의 방
새벽 두 시 현관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고 문을 열자 경찰관이었고 그는 내게 함께 가야 한다고 했다 이런 일은 원래 갑작스런 것이라고 환하게 불 켜진 파출소로 들어가자 긴 의자에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그는 부산스럽게 왔다 갔다 하며 컴퓨터로 업무를 보고 몇 통의 전화를 받아 짧게 사무적인 말들을 했다 나는 그에게 언제까지 여기 앉아 있어야 하냐고 물었지만 곤란하다는 듯 좀더 기다려 보라 말했다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는 무척 피곤해 보였는데 구벅꾸벅 졸더니 그만 책상에 엎드렸다 나는 여기 계속 앉아 있어야 할까 고민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도망치듯 나갈 수도 없었다 잠든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늙고 병들어 보였다 겉옷을 벗어 그에게 덮어주고 그의 책상에서 죽어있는 화초에 물을 주었다 중얼거리듯 그가 잃어버린 것이 있지 않습니까, 라고 내게 물었다 그리고 반드시, 반드시 찾을 겁니다, 라고 잠꼬대하듯 말하더니 다시 잠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다시 긴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잃어버린 것이 분명히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런 질문과 이런 밤이 처음은 아닌 것 같았다 잃어버린 것이 있다
환상의 빛 (P.20)
집은 햇빛에 불타고
나는 깨끗한 물에서 잠들었다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여름 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비닐하우스
추워서 들어간 그곳이
말할 수 없이 포근해 놀랐습니다
검고 촉촉한 밭고랑 사이로
푸른 상추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밖은 겨울
이토록 얇은 비닐일 뿐인데
겨드랑이에 땀이 났습니다
안이 너무 넓고 투명해
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닐 너머에
환하고 환한 빛들이 있는 것처럼
상추는 믿을 수 없이
크고 싱싱한
날개를 펄럭이며
이곳은 누구의 집인지
누구의 꿈속인지
묻지 않았고
끝없는 겨울이라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미아의 겨울
아침밥을 만들어놓고 한나절을 기다렸는데
개와 고양이와 토끼가 오지 않았다
미아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젯밤 숲에서 얼어 죽은 건 아닐까
밤사이 온도계의 유리는 깨져 있었다
미아의 낡은 집은 바람이 불 때다 덜컹거렸지
해마다 겨울이면 많은 이가 죽었다
늙어버린 미아의 친구들은 이제 다들 고아가 되었다고
울먹이며 말했지
고아가 아닌 적 없었던 미아는
막연히 슬프고 왜 우는지 모르면서 운다
오늘 밤엔 또 누가 고아가 될까
겨울밤엔 끝나지 않는 긴 소설을 읽어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 속에서 얼음이 된
춥고 배고픈 개와 고양이와 토끼를 생각하다가
캄캄한 밤 등불을 들고
어두운 처마들을 지나 백색 나무들을 지나
겨울 숲으로 들어간다
오늘 밤엔 또 누가 고아가 될까
계면界面
k는 죽은 후에도 가끔 산책을 한다
p는 죽은 후에도 가끔 시를 쓰고 담배를 핀다
r은 술을 마시고 꿈도 꾼다
어제는 오래전 죽은 친구를 만나 강에서 수영을 했는데
죽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b는 살아 있는 사람인 척 온종일 카페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옆 테이블에서 떠드는 사람들도
살아 있는 척하느라 그런 것 같았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누가 죽은 사람인지 산 사람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m은 아이를 낳고 나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은 잊기로 했다
생각해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h는 죽은 애인과, y는 산 애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기로 맹세했다
g는 죽었다가 일 년에 한 번씩 깨어나
자신의 개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다시 죽었다
z는 매일 해산물 요리를 먹으며
죽어서도 이걸 먹을 수 있다면 죽음 따윈 문제될 게 없다고 확신했다
w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오직 완전한 죽음을 바랐다
한밤중 불 켜진 사무실
n은 매일 밤 야근을 했다
그러다 책상 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고
잠에서 깨면 다시 야근이 시작되었다
불 꺼진 시장에서 버려진 야채를 줍던 노인은
늘어선 천막과 전깃줄 위로 가득 내려앉은 검은 까마귀 떼를 보고
두려워하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면
죽음이 무슨 소용인가요
가수는 노래하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죽고 죽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 노래하고
s는 어제 쓴 일기를 반복해 써 내려가고
c는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을 매일 베껴 적는다
불행한 일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불운한 날들이 빛처럼 쏟아져 내려도
도시가 잠기도록 비가 내려도
말을 때리는 사람들
말을 탄 적 없는데
말을 본 적도 없는데
언제부턴가 나는 말을 때리고 있다
이 매질을 멈출 수가 없다
누가 명령했을까
더 세게 때려야 더 빨리
더 더 먼 곳으로 간다고
말의 얼굴을 눈을 슬픔을 보지 않으려고
말의 뒤에서
나는 말을 때리는 사람이 되었지
말을 때리는 소녀는 자라서
말을 때리는 노인이 되고
말을 때리는 이웃이 되고
말을 때리는 밤이 되고
말을 때리라는 목소리가 되고
보이지 않는 말을 만들어내는 믿음이 되고
말이 얼마나 큰지
말이 얼마나 오래 달리는지
말을 때리는 소녀는 아직 모른다
부고訃告
그해 시월
공중에는 검댕이 마구 날아다녔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우산으로도 막아봤지만
피할 수 없었다
밤이 되면 씻고
낮이면 다시 더러워졌다
십일월의 나뭇잎들은 나무에 매달려 지지 않았다
검고 불길한 생물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면 울면서 노래도 불렀다
십이월이 오자
검은 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저것이 눈이라니 (저것이 눈인가, 저 검은 것이 눈이라니)
믿을 수 없다는 듯 탄식하는 사람들 사이로
신난 개들이 뛰어다녔다
더러워진다고 죽는 건 아니다
잠들기 전 사람들은 눈을 감고 속으로 되뇌었다
먼 곳에서 발생한 큰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는 걸
곧 이곳을 휩쓸 거라는 걸
그들은 몰랐다
그들만 몰랐다
안티고네
좁고 어두운 방
창가에 기대서서
마지막 햇빛이 떠나가는 걸 본다
오늘 죽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오늘 산 자는 영원히 살지 않고
결코 다시 죽지 않으리
마지막 햇빛이
사라지는 걸 본다
0℃
라디오를 켜놓은 채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꿈속에는 과거의 사람들만 가득했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마저도
공동묘지와 아파트가 구분되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과 죽어 있다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
햇볕 속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제설차가 지나갔다
죽은 사람이 아직도 노래를 부르고 있다
우리 집 지붕 위에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도시에서 사람들은 영원히 젊어 보였다
죽음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누구도 거절하지 못했다
죽어야만 가장 먼 곳을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을
달에 다녀온 사람도 알지 못했다
때로 깊은 밤
극장의 어둠 속에서만 눈물을 흘렸다
창밖으로 미끄러져가는 빙하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지구만큼 오래된
한없이 깊은 잠
그런 밤이면 연필을 깎고
나는 백지 속으로 들어갔다
너무 오래 잠들어
꿈이 나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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