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필사 노트

[소설 필사] 나의 사랑, 매기, 김금희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

 

 

 

P.21
"잘 지내, 미래는 현재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단지 긴 현재일 뿐이야"

 


P.22
어느 날은 현재의 사랑과 미래의 사랑이 동일하리라고 약속하는 것도 같았고, 또 어느 날은 이 기약 없는 연애는 초저녁에 정리하는 편이 낫다는 선언처럼도 느껴졌다. 아니면 그 둘 모두를 포괄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사랑의 형식인 연애는 끝이 나지만 사랑이라고 하는 상태는 끝이 나지 않아서 미래가 현재의 무제한 연장인 것처럼 어쨌든 유지되리라는 것, 가능한 죽을 때까지 사랑하리라는 것.

 


P.26
나는 그렇게 내 인생 전부가 시험에 든 것처럼, 트라우마와 유년의 슬픔, 핸디캡, 콤플렉스, 꼬인 마음 전부를 그 문장에 담갔다 뺐다 하면서 시들시들 곯아갔다.

 


P29
나는 그것을 열어보는 일을 최대로 미루고 있다가 노란 고무줄에 손가락을 넣어 풀었는데, 거기에는 아주 간단하게 "나는 인간이니까 당연히 섹스를 하며 살아야 해"라고 쓰여 있었다.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P.34
이름이 아니라 별명을 지어 부르자는 규칙이 추가된 날, 우리는 호텔에서 자고 새벽에 종로로 나와 아침 식사 거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는데, 매기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그 분명한 선으로 그어진 보도블록의 촘촘한 간격만큼 모멸이 연속되는 듯했다.

 


P.56
"안 되죠, 일상적으로 만나는 것들은 쉽게 진저리가 나거든요."

 


P.60
매기를 사랑하고 나서 줄곧 나를 붙잡았던 의문은 왜 내가 이런 관계를 선택했는가, 였다. 그런데 적어도 9호선에 몸을 구겨 넣고 만원의 상태를 견디며 바닥과, 그 바닥의 깊음과, 그래서 겪는 불편과 고통과 힘듦과 귀찮음 모두의 원인인 한강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매기와 나의 관계에서 선택이란 가능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빗물이 손바닥을 적시듯 매기가 내 인생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는.

 

 

P.84
그리고 월드컵 응원을 나온 사람들에 이리저리 치여서 목적하지도 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군중 속에서 밀착되다가, 그렇게 밀착되다가 더 공간을 두지 못했을 때에는 매기가 무슨 의도인지 알듯 말듯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 손을 끌어 올려 두 손으로 소중히 맞잡은 다음 입술을 가져다 댔고 매기는 장난인지 아니면 약간의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몰라도 내 손목 위에다 엑스 자를 그리며 안 돼, 오늘은 여기까지, 라고 했다. 물론 내가 정말 거기까지만 원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의 일이었다.

 


P.96
어쩌면 나는 정작 실제 신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슈뢰딩거도 그저 비유했을 뿐 실제로는 독극물이 주입된 상자 안에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도 모를, 그래서 여부는 따질 필요도 없는 그 고양이에게까지 슬픔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래, 당신은 고양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나, 죽었다고 생각하나.
상관없어요.

이윽고 매기는 마지막 대사를 쳤고, 그러면 나는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듯 그래, 상관없구나, 상관이 없구나 싶으면서 뭔가 서늘한 상실감을 느꼈다.

 


P.109
출판사 동료들과 함께 야근이 끝나고 광화문으로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엉뚱하게도 이렇게 해서 세상이 바뀐다면 매기와 나의 관계에도 어떤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했던 오늘은 단지 긴 현재일 뿐인 미래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P.120
"매기라고 부른 건 매기 큐 때문이 아니야."
한동안 바람을 맞고 있던 내가 그때까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영영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알아."
매기는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면서 바람 때문인지 눈은 채 뜨지 못한 채로 답했다.
"그 순댓국집 아줌마에게서 왔지."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을까?"
매기는 한동안 말해주지 않다가 우리를 그나마 예쁘게 봐준 사람이잖아, 라고 했다.

 


P.124
담아드릴까요? 나는 배낭을 메고 있었지만 넣어달라고 했고 그가 비닐봉지를 뜯어 그것을 넣고 내가 건넬 때 어쩔 수 없이 손가락들이 스쳤다. 나는 그것을 주고받았을 때의 느낌을 아마 긴 시간이 흘러도, 어쩌면 매기와 관련한 기억들 중에서 가장 무거운 무게로 가려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어디에도 미뤄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매기에게도 정권에게도 이 세상이나 어느 사랑에게도. 아무리 동산 수풀은 사라지고 장미꽃은 피어 만발하더라도, 모두 옛날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시간이 지나 나의 사랑, 매기가 백발이 다 된 이후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