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행
조치원이나 대전역사 지나친 어디쯤
상하행 밤열차가 교행하는 순간
네 눈동자에 침전돼 있던 고요의 밑면을 훑고 가는
서느런 날개바람 같은 것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느 세계의 새벽과
네가 놓쳐버린 풍경들이 마른 그림자로 찍혀 있는
두 줄의 필름
흐린 잔상들을 재빨리 빛의 얼굴로 바꿔 읽는
네 눈 속 깊은 어둠
실선의 선로 사이를 높이 흐르는
가상의 선로가 따로 있어
보이지 않는 무한의 표면을
끝내 인화되지 못한 빛이 젖은 날개로 스쳐가고 있다
톡 톡
그 여자는 매니큐어 바르기를 좋아한다 올 터진 스타킹 갈라진 손톱 찢어진 나비날개 분홍빛 벌레구멍 솔기 끝 어디에든,
손가락만한 매니큐어를 만지작거리며 그 여자는
금간 애인과의 사이를 어떻게 메울까 한동안 훌쩍거리다
고양이처럼 달랑 의자에 올라앉아 엄지발톱에 톡, 톡, 매니큐어를 바른다
그래, 톡 톡 소리에 귀 기울여보는 것도 괜찮겠다
톡톡, 메밀밭 메밀꽃이 하얗게 귀 트이는 소리
톡톡, 호박잎 위에서 배꼽달팽이 발가락 펴는 소리
톡톡톡, 등푸른 오이가 칼날 위를 뛰어가는 소리
톡톡, 끝여름밤 귀뚜라미망치로 휘어진 철길 두드리는 소리
톡톡, 글자 위를 기어가는 칠점무당벌레 오자탈자 골라내는 소리
톡톡, 소라고둥이 버얼걸 폐선 밑바닥에 붙어 심해를 노크하는 소리
이제 울음 그쳤니?
톡톡, 구름이 눈썹창 여는 소리
병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그들은 늘 그의 오른쪽에 앉는다
아내 투정도 아이의 까르륵 웃음도
여름날 뻐꾸기 울음소리도 빗소리도 모두
그의 오른쪽 귓바퀴에 앉는다, 소리에 관한 한
세상은 그에게
한바퀴로만 가는 수레다
출구 없는 소리의 갱도
어둠의 내벽이, 그의 들리는 귀와 들리지 않는 귀 사이에
그의 비밀은 사실, 들리지 않는 귀 속에 숨어 있다
전기를 가둬두던 축전병처럼, 그의 왼쪽 귀는
몸에 묻어둔 소리저장고
길게 목을 뺀 말 모자를 푹 눌러쓴 말 눈을 뚱그렇게 뜬 말 반짝반짝 사금의 말 진흙의 말 잎과 뿌리의 말, 세상 온갖 소리를 삼킨 말들이 말들의 그림자가 그의 병 속에 꼭꼭 쟁여져 있다
그것들의 웅집된 에너지를 품고 그의 병은
돌종처럼 단단해져간다
한순간, 고요한 폭발음!
소용돌이치며 팽창하는 소리의 우주가 병 속에, 그의 귓속에 있다
예감
왜 가슴보다 먼저 등 쪽이 따스해오는지, 어떤 은근함이 내 팔 잡아당겨 당신 쪽으로 이끄는지, 쉼표도 마침표도 없는 한 단락 흐린 줄글 같은 당신 투정이 어여뻐 오늘 처음으로, 멀리 당신이 날 보았을지 모른다는 생각 했습니다 우주로의 통로라 이른 몇번의 전화는 번번이 그 외연의 광대무변에 놀라 갈피 없이 미끄러져 내리고 더러 싸르락싸르락 당신 소리상자에 숨어 있고 싶던 나는 우물로 가라앉아버린 별 별이 삼켜버린 우물이었지요 별들은 불안정한 대기를, 그 떨림의 시공을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반짝임을 얻는 생명이라지요 벌써 숨은 별자리도 찾은 듯한 낯선 두근거림, 어쩌면 당신의 지평선 위로 손 뻗어 밤하늘 뒤지더라도 부디 놀리지는 마시길, 단호한 확신이 아닌 둥그렇게 나를 감싼 다만 어떤 따스함의 기운으로요
거울 속의 벽화
대합실 장의자에 걸터앉아 심야버스를 기다린다
왼쪽 벽면에 붙박인 거울을 본다
거울의 얼굴엔 마치 벽 속에서부터 시작된 듯한
뿌리깊은 가로금이 심어져 있다
푸른 칼자국을 받아 두 쪽으로 나누어진 물상들
잘못 이어붙인 사진처럼
하나같이 접점이 어긋나 있다
그녀의 머리와 목은 어깨 위에 서로 비뚜름히 얹혀 있다
곁에 앉은 남자의 인중 깊은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멈춰선 톱니바퀴처럼 비끗 맞닿아 있다
그 무방비한 표정 한 끝에 아슬하게 매달린 웃음을
훔쳐보던 내 눈빛이, 스윽
균열의 깊은 틈새로 날개꼬리를 감춘다
물병에 꽂힌 작약, 소스라치게 붉다
일그러진 둥근 시계판 위에서
분침과 시침이 포개 잡았던 손을 풀어버린다
이 모든, 아귀가 비틀린 사물들 뒤에서
아카시아 어둔 향기가 녹음의 휘장 속에 어렴풋 속을 보이고
그렇게 조금씩 제 각도를 비껴나고픈
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의 초상이 벽 속에 있다
명반응
-문경 일기-
(내 몸의 잎파랑이들도 어떤 날은 햇살이 고플까)
검은 아스팔트가에 쭈그려 앉아
눈뜨는 가지들 올려다보다
한순간, 내 시선에 붙들려 멈칫대는 구름 덩어리
마른하늘에다
나 환하게 물꽃송이 매다는 동안
가볍게 무너지며 부서지며 다른 나무에게 흘러가
그제야 만개하는 구름,
나는 그날
구름을 끌어다 나무 위에 얹어두었다
얹어두고 돌아왔다
다부터널
산호색 불빛을 지닌, 고둥 속같이 깊고 아름다운 저 터널이 뒤집어쓴 등성이가 실은 거대한 공원묘지였다니
치통처럼 욱신거릴 망자들 잠이, 뿌리째 들쑤셔져 어정쩡 반공중에 들어올려져버린 스밀 곳 없는 죽음들이 민망해서가 아니라 유예한 내 죽음을 미리 도굴당한 느낌, 누군가 벌레처럼 그 속에다 구멍을 파 들고남을 보아버린 께름칙함
다시 생각건대 그러나 이는 그리 무거운 문제가 아니랄밖에, 저것 또한 삶이 만들어놓은 죽음의 한 형식일 뿐, 죽음은 다만 죽음 그대로 시종 고요할 것이라는 확신과 안도
물의 꽃
대야에 부어둔 연분홍빛 섬유유연제
무심코 풍덩 적셔낸 블라우스 앞섶에 뚜렷한 반점을 찍었다
그릇 바닥엔 물이끼처럼 남아 있는
검자줏빛 침전물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본 모든 부드럽고 환한 붉음들은
차디찬 응혈에서 출발했을지
너의 연못에 돋아난 둥근 무늬결도
멀리, 중심에서 아련해졌을 때, 비로소 물의 가벼운 날개를 얻었을지
내가 아는 어떤 묽은 꽃빛깔도
건져낸 핏물 아닌 게 없었으니
너는 어둠을 풀어 만든 새벽
꽃 피어나듯 바깥으로
바깥으로 풀려난 소용돌이의 보폭은
흔들리는 어떤 이의 마음나빈지
느티 속의 느티구름
정교한 이등분, 반신은 죽어 있고 반신은 살아 있는
그 기묘한 느낌의 느티나무는 남도 한 고택 바깥마당에 있었다
어떤 자의식이 그를 저리 몸 밖에다 세워두려 했을까
몸, 그 한량 없는 아득함으로
커다랗게 그림자를 일으켜 세워
곁에다 붙들어둘 수 있다니
출렁이는 동쪽 가지와 검게 탄 가지 사이, 무엇이 있었나
창문을 기웃대던 적설의 눈썹과
함석지붕을 밟고 간 먹구름 발자국
굴뚝새가 물고 나간 불씨를 찾아 두리번대는 화덕의 그림자
무지개는 그럼 어느 가지에다 걸어두어야 하나
아직 한번도 이 세상에 온 적 없는 그런 신비한 초록을 기다리듯
내 속에서 걸어나간 나를 마중하지 말란 법도 없겠다싶어
나도 그날 우두커니
해를 가리고 선 일식의 환처럼
겉몸 위에다 속의 몸을 겹쳐 입은
한그루 나무 형상의 이상한 시간 안에 있었다
어둠의 단애
저문다는 것, 날 저문다는 것은 마땅히 만상이 서서히 자신의 색을 지우며 서로의 속으로 스미는 일이라야 했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서로의 그림자에 물들어가는 일이라야 했다 그렇게 한 결로 풀어졌을 때, 흑암의 거대한 아궁이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는 일이라야 했다
너를 바래다주고 오는 먼 밤, 제 몫의 어둠을 족쇄처럼 차고 앉은 하늘과 땅을 보았다 개울은 개울의 어둠을 아카시아는 아카시아의 어둠을 틀어 안고 바윗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누구도 제 어둠의 단애 밖으로는 한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한 어둠을 손 잡아주는 다른 어두움의 손 같은 건 볼 수 없엇다
빨래꽃
추위 조금 풀린 날
헌 신문지나 정리할까 햇볕 드는 베란다 문 여는 순간
잠시 휘청했습니다, 묘하게 감각을 흔드는 향기
담배꽁초 매운 내마저 가볍게 눌러 끄는
무엇일까 이것은, 그새 한란이 곷 피워낸 줄 알고
난분에 다가가 고요한 잎새들만 이리저리 뒤적였습니다
무심코 전망창 왼편으로 고개 돌리니, 아
하늘색 빨래걸이에 말그레 웃고 있는 몇잎의 빨래
그것의 입김이었습니다, 프리지아향 산뜻한
리허설
그의 문병차 들른 대학병원 중환자실, 창밖을 보는 이의 시선엔 상식의 의표를 찌르는 장례식장 붉은 문자등 무슨 긴한 절차라도 밟듯 아이 손을 쥐고 쉼 없이 병실로 찾아드는 일가붙이들 그를 미리 죽음 쪽에 옮겨 앉힌 채 남은 시간 일일이 남은 자들의 배웅을 받게 하는 일은 환후 이상 끔찍해 보인다 삶의 편에서 말하자면 이는 조문 리허설 같은 것 나 또한 적이 평온한 얼굴로 그의 여윈 손을 잡고 몇마디 더운 말을 건네지만 이미 한장 네거티브 사진으로 고정된 눈에 스치는 어떤 애잔함과 스산함을 보고 말았다
달의 난간에 기대다
구릉 위의 찻집 달빛에서 우리가
십년 전의 네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일 동안
해안선 모양으로 휘어진 선로엔
삼사분에 한번씩 기차가 지나갔다
(종착 없는 물결의 오고 감, 달 기운에 붙들린 썰물과 밀물처럼)
거의 아흔번째 기차의 짧은 신호음을 끝으로
분주하던 바퀴 소리 그치고
나는 깜빡
제라늄 꽃떨기 분홍으로 바래가는 낡은 역 승강장을
최초의 빛 최초의 기적으로 미끄러져간
내 기차의 이마 환한 불빛의 눈을 본다
밤이 빈 가지 끝에 등롱을 매달 동안
너는 네 몸속 백양나무숲과 조곤조곤 옛날의 별들을
건져 유리창에 붙인다
망망대해 어둠의 해면을 표류하는 달빛
하늘 가장자리로 흘러내린 입김이
청보리 뿌리 들어올리며 결정의 얼음꽃을 피울 때
새벽차를 잊어버린 너는 바다 너머로 흔들리고
그 흔들림 뒤꼍 이곳은 달의 난간인 듯이
카프카의 잠 속으로 들어간 바닷가재 한마리
백화점 지하매장에서 본 꽁꽁 묶인 바닷가재 한마리
넓적한 접시에 담겨 내 침대 위에 놓여 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어떻게 사람들은
이 딱딱한 등껍질을 열고 들어가 부드러운 잠의 속살을 파먹을 수가 있지
예리한 포크나 큼큼한 손가락으로?
기왕이면 백포도주도 한잔 곁들였으면 좋겠네, 잠꼬대하듯 느물대는 나는
이미 그것의 달큰한 속살을 꺼내 먹는 중이다
접시 위엔 헐렁한 붉은 껍데기만 남았다
꽤 실속 있는 녀석이잖아 빈 몸통을 침낭 삼아 훌러덩, 뒤집어써도 좋겠군 어디 한번......
내일 아침 그들은
각질로 된 등허리를 반듯하게 침대에 대고 누워 있는, 활 모양의 딱딱한 마디들로 나뉜 기다란 복부를 가진, 수 많은 다리를 쓸데없이 허우적거리는*
전혀 새로운 모습의 나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카프카 <변신>에서 인용.
안개주의보
수성못 02시, 물안개가 가볍게 도시를 세상 저쪽으로 안아 올린다 이 몽환적인 야경을 두고 누구는 약간 싸구려화가 냄새가 난다 하고 누구는 못 전체를 포옥 한 숟가락에 떠 담을 수는 없을까 묻는다 횡으로 손 잡은 가등 불빛 여남은 송이가 수면으로 뛰어내려 연등처럼 흔들린다 너는 일렁이는 안개숲이나 불빛 꽃잎사위 안에 다만 출구 없는 방 한칸 갖고 싶다
네가 마신 안개와 너를 들이킨 안개, 이들의 연대는 소리의 입을 막고 가로수 우듬지 가늘게 떠는 숫구멍까지 눌러 덮었다 자늑자늑 풀솜처럼 네 잠을 덮어 잠을 지우며 하늘로 범람하는, 안개는 이제 위험수위다 수심을 향해 섬인지 쪽배인지 흐릿 느릿 다가가는 그림자 거기, 밤마다 익사하는 네 꿈을 지켜본다
밤, 너의 집은 안개 저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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