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니
어린 나는
무너지는 마음 안에 있었다
무너지는 것이 습관이 된 줄도 모르고
무너지고 무너지면서
더 크게 무너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주저앉을 마음이 있다는 건
쌓아올린 마음도 있다는 것
새가 울면
또다른 새가 울었다
또렷하게 볼 수 있다면
상한 마음도 다시 꺼내볼 수 있을까
도마 위에 방치된 생선이나
상온에 오래 놔둔 두부처럼
상한 것은 따듯하고
상한 것은 부드럽게 부서진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은
감당할 수 없는 일로 남아
마음을 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빛이 물속으로 들어간다
물을 찢으며 들어간다
어린 나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손바닥이 열려
흐른다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아침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두꺼운 이불을 덮고
맞물리며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했다
덜 자란 나무는 따듯할 수 있다
한번 상하고 나면 다음은 쉬웠다
한 사람이 있는 정오
어항 속 물고기에게도 숨을 곳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낡은 소파가 필요하다
길고 긴 골목 끝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작고 빛나는 흰 돌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지나가려고 했다
자신이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진짜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복이 우리를 자라게 할 수 있을까
진심을 들킬까봐 겁을 내면서
겁을 내는 것이 진심일까 걱정하면서
구름은 구부러지고 나무는 흘러간다
구하지 않아서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구할 수도 없고 원할 수도 없었다
맨손이면 부드러워질 수 있을까
나는 더 어두워졌다
어리석은 촛대와 어리석은 고독
너와 동일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오래 기도했지만
나는 영영 나의 마음일 수밖에 없겠지
찌르는 것
휘어감기는 것
자기 뼈를 깎는 사람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나는 지나가지 못했다
무릎이 깨지더라도 다시 넘어지는 무릎
진짜 마음을 갖게 될 때까지
균형 잡힌 식사
잠자리를 자르면, 빨간 꼬리가 바람에 날아다녔다. 빨랫줄을 잡고 있는 다리와 팽팽한 날개, 우리들의 균형은 그렇게 시작된다.
터널 안쪽에는 그림자가 가득 채워져 있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건너왔다. 나는 늘 이쪽에 있지만.
연이 손에서 멀리 날지 못했다. 끊어진 적 없는 손가락.
사물함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가방을 메고 걷는 사람에겐 목적지가 있어 보인다. 지퍼가 열려 있었다.
빈 교실에서, 잠긴 문 안에서. 운동장이 마르는 자국을 자주 지켜보았다. 가만 보면, 모두가 친해 보여서.
갖고 싶은 것은 그렇게 생겨난다. 멀리 있을 때, 돌아갈 수 없을 때.
초록색 호두를 두 손에 쥐고, 껍질과 껍질을 벗겨내는 동안. 손은 이미 달라져 있다.
밤과 낮
북쪽 숲을 지나왔어 태어날 때의 형상은
한쪽이 길어지면 한쪽은 짧아진다 가려움은 한꺼번에 몰려온다
우린 모두 연결되어왔어
그럴 때마다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어 그런 날이 자주 왔어
트랙을 돌고 있다 이곳엔 울타리가 많아
농담들이 사는 곳 어떤 이름도
자주 뒤집히는 곳
새로운 색이 떠돌고 있어 어떤 색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고
허리는 누구에게 가 있는 것일까
거기서 나와
돌고 있은 지 한참이 지났어
떠오른다고 생각하면
다리가 길어지는 기분이 든다 어깨가 물렁해진다
웃음이 많은 사람은 어딘가 외로워 보여
곁이 너무 환해서 점점 더 어두워지는 오후
토마토가 끓고 있는 냄새로 뒤덮였어 뜨거워
그렇게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들 때
떨어지기 직전의 열매를 만난다
뿌리와 잎이 가장 멀어졌을 때, 어제와 내일이 가장 멀어졌을 때
툭
신기해
오늘이 오는 시간
캔들
궁금해
사람들이 자신의 끔찍함을
어떻게 견디는지
자기만 알고 있는 죄의 목록을
어떻게 지우는지
하루의 절반을 자고 일어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흰색에 흰색을 덧칠
누가 더 두꺼운 흰색을 갖게 될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은
어떻게 울까
나는 멈춰서 나쁜 꿈만 꾼다
어제 만났던 사람을 그대로 만나고
어제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징그럽고
다정한 인사
희고 희다
우리가 주고받은 것은 대체 무엇일까
질의응답
정면에서 찍은 거울 안에
아무도 없다
죽은 사람의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
버티다가
울었던
완벽한 여름
어떤 기억력은 슬픈 것에만 작동한다
슬픔 같은 건 다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
어째서 침묵은 검고, 낮고 깊은 목소리일까
심해의 끝까지 가닿은 문 같다
아직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이 났다
불 꺼진 고백
너의 말이 진짜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에 마음이 간 적 없었다. 고요를 알기 위해선 나의 고요를 다 써버려야 한다고. 가두어둔 물. 멈춰 있는 몸.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
버티기 위해선 버틸 만한 곳이 필요했다. 눈동자가 흔들릴 때. 몸은 더 크게 흔들린다. 중심을 잡기 위해 비틀리는 몸짓. 거울이 나를 도와주진 않는다. 노크하기 직전의 마음을. 울 수 없는 마음을. 나는 불 꺼진 창을 본다.
온
날지 못하는 새의 이름을
녹슨 나사
깨진 창문에 비치는 얼굴을
나는 없는 것에 대해서만 말했다
무너지고 있는 집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큰비가 올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창밖을 보지 않기로 했다
얼굴이 벗겨질 것 같았다
죽은 비둘기떼의 펼쳐진 날개
뒤집힌 우산들이 쌓여 있는 곳
나는 하류로 가지 못했다
허리까지 차올랐던 물이
끌고 내려가는 것들을 생각했다
뿌리 뽑힌 풀들이 메말라 있어도
끊어지지 않는 별
나는 이제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남아 있는
큰비가 온다
나는 소문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간다
구월
당분간
슬픈 시는 쓰지 않을게
영혼을 드러내려고 애쓰지 않을게
액자 안의 그림이 무엇이었는지
말하지 않을게
밝은 것을 견디지 못하던 사람이
어두운 것을 견디게 될 때
커다란 양초와 과자 상자
챙이 넓은 모자를 들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게
최초의 미로를 만들었던 사람이
혼자 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고 쓰지 않을게
밖에 오래 서 있다
그러다 돌연히
다짐했던 말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났다고
계속 믿고 있었지
정말 아닐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갑자기 끊겨버린
노래의 뒷부분이 생각났다
빛의 역할
너는 가장 마지막에 온다. 차오르지 않는 빈 몸으로 온다. 싫다고 말하면 돌아서는 사람들과 있었다. 계단에서 발을 헛딛고 주저앉는 사람들과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입을 삐죽이며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저기 저 숲에서는 수천 마리의 새들이 날개를 접고 앉아 있다. 누가 먼저 울음을 멈추는지 보려고 했다. 멈춘 창문. 멈춘 식탁. 손을 잡고 있는 손.
우리에겐 영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있었다. 아무렇게나 여름을 건너려는 사람들과 있었다. 뭐지고 있는 집 안에 들어가 깨진 물건들을 함부로 만졌다. 아무것이나 붙잡고 매달리고 싶어 하는 두 팔. 습기와 슬픔이 구별되지 않는 팔월. 매일 같은 자리 같은 공간에 있었다. 튀어오르지 못하는 공은 구르다가도 멈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기 기도에 얽매이면 안된다고. 마지막은 늘 그렇게 끝났다.
토마손
계단이 없는 육교 위에 서 있었다
세살 때 돌아가셨다는 외할머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본 적 있는 얼굴일 텐데
다리 밑엔 횡단보도 표지판이 있었다
강물을 횡단하는 강물을 보았다
어제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이년 전에 들었던 말은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났다
나를 보면 뭐가 보여?
건너편 건물 이층엔 현관문이 있었다
창문들 옆에 나란히
누군가 한번쯤 열어보고 싶어 했다면
그건 나였을 것
오늘 날씨는 예전에도 겪은 적 있는 것 같다
공중에 매달린
없어진 식당의 간판
그리고
닫힌 계단
쏟아진 계단
닿아 있는 계단
세상에서 가장 쓸모 있는 것이라는 듯이
너무 많은 계단이 이상했다
매일
처음 살아보는 날이라는 말도
목화
지금 이곳의 사람들 말이야
알아볼 수 있겠어?
하얗게 부풀어오른다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질문하는 사람은 질문에 대해 알지 못하고
나는 옛날 일은 잘 잊는다
멀리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
얼굴이 무거워지는 것은 모른 척하기로
걸음 뒤에는 발자국이 반만 남곤 했다
선물을 한다면
물에 젖지 않는 새의 깃털을
무엇이 만들어질지 모를수록 좋았다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물건을
오래 가지고 있던 마음과 같았다
나를 지워도 다 지워지지 않았다
하얗고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전부를 맡긴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지
나만 알고 있어야 하는 악한 일들에 대해
계속 말하고 싶었다
웃으면서 헤어지고 나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생일 편지
정신을 똑바로 차려. 그러면 잠이 쏟아진다. 발이 무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스팔트가 녹고 있어서. 긴 장화를 샀다. 비가 오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한번 사라진 계단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철제 사다리를 어깨에 메고 한참을 걸었다.
'목적지를 정하면, 도착할 수 없게 된다.'
가지고 있던 지도에 쓰여 있던 말. 나는 백색 지도를 보고 있다. 주머니에 구겨넣자 주머니가 터져 버렸다.
시작을 시작하기 위해선 더 많은 시작이 필요했다.
베란다의 기분. 축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틀렸어. 틀려도 돼.
하얀 목소리가 벽에 칠해진다.
발이 더 무거워졌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너는 무서워하면서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파고
두 손은 먼 곳에 있다. 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너는 처음부터 모른다고 했다. 슬픔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슬픔이 숲에 가득 찬다. 숲을 보고 있다. 거대한 바위를 보고 있다. 바위 속에 있는 바위를. 바위 속에 있는 슬픔을. 씨앗을 꺼내려면 열매를 부숴야 한다.
웅크리고 앉아서 뭐 하고 있어?
그냥 혼자 있어요.
우리가 자주 하던 말
우리가 자주 듣던 말
너의 눈빛은 돌 같아. 바위 같아. 그 안이 다 보인다. 집 안에서도 비를 맞고 서 있었다. 흠뻑 젖은 내가 너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자라서 시체가 될까
제대로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
열차는 제시간에 맞춰 출발한다.
열차가 지나가면 우리도 지나갈 수 있겠지
각자의 목적지로, 반대 방향으로.
여름의 발원
한여름에 강으로 가
언 강을 기억해내는 일을 매일 하고 있다
강이 얼었더라면, 길이 막혔더라면
만약으로 이루어진 세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아주 작은 사람이 더 작은 사람이 된다
구름은 회색이고 소란스러운 마음
너의 얼굴은 구름과 같은 색을 하고 있다
닫힌 입술과 닫힌 눈동자에 갇힌 사람
다 타버린 자리에도 무언가 남아 있는 것이 있다고
쭈그리고 앉아 막대기로 바닥을 뒤적일 때
벗어났다고 생각했다면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한쪽이 끊어진 그네에 온몸으로 매달려 있어도
네가 네 기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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