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 이불
오늘도 달빛 덮고 잠들어요
오늘은 반달이에요
달도 반은 자야 하니까요
저도 반만 잘게요
-ㄴ 지 모르겠어
어쩌면 우리는 이미 사라진 태양계를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아득한 별이 수명을 다하기 일만 년 전
이만 광년을 내달려와 우리에게 별빛으로 존재하듯
우리는 현재 지구라는 행성에서 밤하늘을
노래할 줄 알았던 직립보행 생물이었는지 모르겠어
공간이 시간을 떠날 수 없듯
시간이 공간을 지울 수 없어서 우리는
당시 생생했던 날들을 재생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때 그곳에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 바다가 있었고
그럴 거면 아예 끝장내라고 목 놓다가
이젠 운명을 치워달라며 무릎 꿇었다가
모래톱에 쓴 이름 삼킨 파도를 응망하다가
혼잣말 발자국만 남기고 떠났던 겨울 바다
길고 혹독한 빙결만 차곡차곡 쌓여
끝내 세상이 얼어붙었던 대사건이 있기 전의 현장을
우리는 당장인 줄 알고 살아내는지 모르겠어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불행을 걸어간 시절에
슬픈 옛사람이 꾸었던 악몽의 등장인물인지 모르겠어
질려 소리친 가위를 흔들어 깨운 손에 이끌려
불쑥 무대 뒤도 퇴장한 건지 모르겠어
여명에만 꺼지는 무대 조며-서녘 달빛이,
무릎으로 세운 홑이불 산맥에 그림자 드리워
흉몽의 능선을 조감도로 보여주고 있는지 모르겠어
하얀 히말라야에 파묻은 얼굴인지 모르겠어
웬 목맨 귀신이 떠났던 대들보 찾아오는 소리냐며
후려치는 바람에 얼얼한 뺨이 벌게져도
손자국은 백 년 후 겨울날 홍시인지 모르겠어
앙상한 당신의 이름을 머리에 이고
겨울이 닳도록 탑돌이 하는지 모르겠어
당신과 나의 시간이 엇갈려 지나가도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당신은 나의 이름을 부정한 지 오래
나는 당신의 이름에 집 지은 지 오래
빗장 건 대문에 얼비친 얼굴이
바로 당신이자 나인지 모르겠어
잡풀 웃자란 마당이 무심한 자손의 묘소인지 모르겠어
행인이 서성이던 자리의 족음이 당신인지 모르겠어
새끼 기린을 뒤따른 바람이 나인지 모르겠어
당신인 줄 알고 밤길에 잘못 부른 이름인지 모르겠어
당신을 고인 물이라 명명한 이는 당신의 여름을 보았는지 모르겠어
당신을 달이라 명명한 이는 당신의 그름을 울었는지 모르겠어
당신을 사자라 명명한 이는 당신의 포효를 들었는지 모르겠어
나를 구렁이라 명명한 이는 나의 허물을 주웠는지 모르겠어
시간의 개울을 건너본 이들은 우리를 살아보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버릴 시간의 돌다리에서
굽이치는 물결을 만진 건지 모르겠어
그래서 살음을 生人이라 하지 않고 人生이라 하는지 모르겠어
당신과 나의 학이편
나의 옛날을 사는 당신과
당신의 훗날을 사는 내가
외따로인 것은 별빛처럼
빛이 닿아도
열은 닿지 않아서이지
빛은 열에서 태어나지만
빛 없는 열은 당신이고
열 없는 빛은 나이니까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
안녕의 시절은 시간이었지
어느 때부터 어느 때까지였지
빛이 열의 손을 놓았던 때는 시각이었지
때를 새긴 어느 한순간이었지
시간의 변주가 시작된 때였지
흩어졌지 오래도록 재편되지 않아
옛날이 훗날로 이행하는 중이었지
어둠을 길 삼아 고독한 길을 갔지
길은 고독을 배웠고 고독은 길을 익혔지
배우고 익혀도 기쁨은 따라오지 않았지
훗날을 사는 내가 멀리서 찾아갔지
옛날을 사는 당신이 찾아오지 않아
내가 당신을 찾아갔지
훗날이 옛날을 즐거워했지만
내가 당신을 즐거워할 뿐이었지
나를 사는 당신을 알아주지 않고
당신을 사는 나를 알아주었지
당신이 섭섭해하지 않아도 여전히
빛은 닿아도 열은 닿지 않았지
몰라주는 달빛이 그저 서운했지
아닌 이야기
사실도 거짓도 아닌 이야기니
아닌 이야기라고 하자
진짜 이야기는
아닌 이야기에서 시작되니
별에게 말하자 별빛이 흔들렸다
별과 별 사이에 인력이 살고 있으니
지시한 별처럼 말끝도 흔들렸다
그러니 흔들리는 이야기를 하련다
잉걸의 이야기는 늘 일렁이니
빛이 바뀌면 눈을 감쌌다
눈감지 못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모든 발견은 난생처음이기에
발견의 비극은 눈을 감출 수 없기에
눈 감아도 잔상은 눈의 길에 서 있기에
그럼에도 참상은 아니라고 믿기에
아닌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겠다
사실이 아니길 바랐지만 거짓이 아니었다
말의 빛은 자라거나 느닷없이 사라졌다
청자는 아팠고 아프다고 호소했다
거짓말! 단언은 화자에겐
거짓이었고 청자에겐 사실이었다
청자는 아팠고
화자는 말을 무를 수 없었다
청자의 통증엔 몸이 없었다
(몸 없이 아프다니!)
화자는 거짓이라 믿고 싶었지만
통증과 청자는 자웅동체였다
거짓의 방에 문이 닫히면
사실의 방에 밤이 열리고
거짓의 방에 불이 꺼져도
사실의 방엔 밤이 켜져 있었다
삼십삼 년의 시차에 몸은 두 번 태어났다
의지는 퇴화하고 감각은 진화했다
청각은 가슴팍 비질 소리를 들었고
시각은 빛의 살을 맞았다
빛은 쪼개져 떼 화살로 날아들었다
눈을 감으면 잔별들이 들끓었다
퇴화된 의지는 말을 배반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선언은 연기되었다
생각은 걸을 때마다 열매를 밟았다
과거는 선명하고 미래는 아득했다
건널목의 종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차단된 말은 우두커니 기다렸다
차단기가 내려진 채 신호는 죽었다
끝내 신호는 말을 거부했다
다시 고쳐 쓴 말은 손아귀에 뭉쳐졌다
거짓의 말은 말의 거짓이 아니었다
거짓을 말해도 사실을 말하는 것이니
모든 아닌 이야기는 사실의 이야기였다
항성이 스스로를 태워 빛나든
행성이 잉걸도 없이 환하든
아닌 이야기에는 여지가 없으니
디딜 곳이 어딘가
찬 달이 빛을 엎지른
언 강을 딛고 서 있으면
강이 녹을까
발이 얼까
청소년
1
생각이 쫓아오지 못하게 내달려요
맨머리로 한겨울을 들이받아요
고장 난 내일이 뒤따라와도
미끄러운 미래로 커브 틀어요
전속력을 내도 지난날을 따라잡을 순 없어요
감당할 만큼만 역주행해요
누구에게도 눈빛은 배달하지 않아요
내 눈빛은 길에 두고 왔어요
2
내 일기를 읽는 이는 없어요
형이 그저 글씨를 만질 뿐예요
검은 땅 어디에서도
돈 없으면 배울 수 없어요
코끼리만큼 쓰레기를 주워야
연필 한 자루와 땅콩 한 줌을 사요
연필을 아껴 짧은 일기를 써요
잠들면 깨알 글자가 깨울 거예요
작별 동행
뒷자리에 당신을 앉히고
단둘이 떠나는 날이 올까
목전이 아픈 당신을
흘깃흘깃 눈에 담아 달리는 날
뭍과 물의 갈림길에 닿을 수 있을까
상반된 경계를 절단할 수 있을까
젖은 뭍과 대양 끝자락을 움키고
당신이 당신에게 작별할 수 있을까
당신을 게워내는 당신
흰 등허리 두드리고 싶어도
다독이지 못한 손 부끄러워
내 먼저 바다에 던져버려야지
귓전에 날아든 쇳소리 설워도
설운 눈망울 보고 감췄어도
당신이 당신을 배웅할 때
따라 울던 내 손도 딸려 보내야지
남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더는 뒤를 엿보지 않을 그날 오면
장한 작별을 하고 잠든 당신 태워
애로를 벗어나 돌아오려니
생각을 생각하며
생각을 생각하지 않아 괴로운 당신
생각을 생각하며 저는 아픕니다
괴로움과 아픔은 둘 다 고통이어도
통각점은 멀거나 가깝습니다
당신의 괴로움은 바깥에 있고
저의 아픔은 안쪽에 있습니다
당신의 안쪽은 비어 바깥뿐이고
안쪽만 앙상한 제 바깥은 헐었습니다
그런 당신의 바깥엔 제가 있고
저의 안쪽엔 당신이 있습니다
종종 바깥마저 도려 안팎이 없는 당신
당신 생살 드러나 제 바깥도 빨갛습니다
그럴수록 색맹이 되어가는 당신은
핏빛을 읽지 못해 비린내만 삼깁니다
안쪽이 빈 줄 모르고 당신은
자꾸만 안쪽을 뱉어냅니다
생각을 생각하지 않아 당신은 떠났습니다
생각을 생각하며 저는 기다립니다
수압
머리를 헹구는데
수압이 낮아졌다
당신이 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당신이 손을 씻는 것이다
기쁜 상상은 그만두자
당장 눈이 매우니
볕 요
고별 없는 작별을 바라보았다
준비 없이 당신은 떠났다
당신이 당신을 떠밀었다
생략을 세워두고 떠나고 싶었다
잘 떠나는지 멀리서 지켜보았다
처소에 돌아와 오래 닫힌 문을 열었다
겨울 볕이 먼저 들어와 누워 있었다
반듯한 볕 요에 누워보았다
생각이 끼어들면 돌아누웠다
볕 요도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당신은 벌써 당도해 기억을 태우는지
삽시간에 방 안이 어두워졌다
천장에 써놓은 말들을 읽어낼 수 없었다
어둠을 끌어 덮고 당신처럼 누워 있었다
묵처럼 한밤이 엉겨 우리를 잠갔다
문자메시지
내일 저의 빈소가 차려집니다.
방금 강변의 장례식장에 예약해두었습니다.
상제가 황망하여 부음을 놓칠까 봐
작별 인사차 미리 말씀드립니다.
어울려 웃고 울던 날들을 회상하시어
남은 저의 식구를 위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왔으니 갑니다.
마음은 두고 몸은 갑니다.
자다가 생각나
적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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